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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자취 곳곳에…'어서 오세요' 한글 문구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지난 8월22~9월1일까지 독일, 체코, 프랑스 등을 돌며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가들의 발자취를 쫓았다. 당시 현장에서 찍은 사진 등을 통해 종교개혁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돌아본다. 장열 기자 사진 도움=김현배 목사(베를린비전교회)ㆍ김한수 목사(베를린순복음교회) 독일의 아이슬레벤은 마르틴 루터가 나고 죽은 곳이다. 광장 중간에 루터의 동상(사진1)이 우뚝 서 있다. 루터가 태어난 방(사진 2)과 죽음을 맞이했던 방(사진 3)은 500주년을 맞아 깔끔하게 리모델링을 한 상태다. 한인 방문객이 많은 탓에 루터 박물관 등에는 '어서 오세요'라는 한국어로 된 문구(사진 4)도 붙어있다. 루터는 평소 글을 많이 썼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쓴 자필 편지(사진 5·6) 등이 아직도 보존돼 있다. 사망 직후 친구와 가족들이 루터를 기리기 위해 얼굴에 석고를 발라 '데드 마스크(사진 7)'도 제작했었다. 루터는 아이슬레벤에서 눈을 감았지만 시신은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비텐베르크로 옮겨진다. 그의 무덤(사진 8)이 비텐베르크 성교회(사진 9)에 있는 이유다. 루터는 이 교회 정문(사진 10)에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95개조 논제를 내걸었었다. 비텐베르크는 작은 도시다. 길 하나에 루터와 아내(카타리나 폰보라)가 함께 살았던 집(사진 11)을 비롯한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크라나흐·멜란히톤)의 집, 성교회, 시교회, 루터가 신학을 가르쳤던 비텐베르크대학(사진 12) 등이 모두 몰려있다. 루터는 주로 집에서 제자들과 어울리며 토론을 즐겼고 강의실(사진 13)도 만들어 신학도 가르쳤다. 집 바로 옆에는 한 그루의 큰 참나무(사진 14)가 있다. 교황이 루터에게 파문장을 보내자 그는 저 나무 밑에서 공개적으로 파문장을 불 태워버렸다. 비텐베르크는 종교개혁의 진원지라서 방문객이 많다. 루터 케이크, 루터 맥주, 루터 엽서(사진 15·16·17) 등 그를 상품화한 제품도 자주 보인다. 종교개혁 사상의 확산은 인쇄술의 발전과 맞물렸다. 루터의 95개조 논제가 인쇄기(사진 18)를 통해 온 유럽에 퍼질 수 있었던 이유다. 당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동상(사진 19)도 있다. 루터는 말년에 반유대주의적 경향도 보였는데 훗날 독일의 나치가 루터의 사상을 오용하기도 했다. 유대인을 비하(유대인이 돼지의 젖을 먹는 모습)하는 부조(사진 20)도 전시 돼 있다. 어쨌든 루터는 개혁을 대변하는 인물로 꼽힌다. 쿠바의 전설적 혁명가 체게베라를 패러디한 루터의 포스터(사진 21)도 눈에 띈다. 박물관에는 재미있는 그림도 하나 있다. 루터가 컴퓨터와 무지개를 등지고 앉아 있는데 날개 달린 작은 악마가 그를 보며 웃고 있는 그림(사진 22)이다. 만약 루터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현시대를 어떻게 바라볼까.

2017-11-13

[취재 그 후](6) 교회가 바뀌면 개인과 사회가 변한다

구원의 가치 개인에만 국한 안 돼 당시 교회는 이웃과 사회에도 영향 종교개혁 이후 '공동 금고함'사용 금고의 열쇠 구멍이 3개였던 이유 '500주년' 콘텐츠성 소비는 아쉬워 무비판적인 수용 역시 경계해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본지는 10월 한 달간 특집 기사로 종교개혁의 현장 방문기를 보도했다. 나는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종교개혁가들의 족적을 쫓았다. 종교개혁의 역사와 의미는 분명 심오하고 방대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거대 담론이 오늘날 현실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인가. 1517년 10월31일 마르틴 루터가 당시 부패한 종교를 향해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논제는 개인을 넘어 사회와 시대의 사조를 한번에 뒤바꾼 대변혁이었다. 루터는 분명 인간은 믿음을 통해 신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외쳤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단순히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걸까. 그렇게만 봐선 안 된다. 중세 기독교의 종교관은 선행과 공덕의 개념을 통해 구원을 이해했다. 말도 안 되는 면죄부 같은 개념이 횡행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때문에 신학이 변질됐고 중세 종교는 탐심으로 배를 불리며 사회 전반을 심각하게 오도했다. 급격히 기울어진 중세는 분명 균형추가 필요했다. 혹자는 '믿음'만을 강조했던 루터 탓에 오늘날 교회들이 '행실'이나 '죄'에 둔감해졌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루터에 대한 공과(功過)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당시 심각하게 비뚤어진 구원론을 재정립하려면 인간의 행위에만 방점이 찍혔던 신학 및 시대적 인식을 타파해야 했다. 이는 불가피하게 대척점에 놓인 '믿음'이라는 개념이 부각돼야만 했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당시 루터의 주장이 유독 인간의 구원관에만 영향을 미쳤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종교개혁은 사회적 가치까지 변화시킬 정도로 여파가 컸다. 비텐베르크 지역에 루터가 살았던 집(현재는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다. 이전 기사에는 전체 맥락상 '면죄부함'을 주로 언급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당시 교회가 사용했던 '공동금고함' 이었다. 공동금고는 종교개혁 이후부터 등장했다. 당시 교인들은 마을에 가난한 이들을 비롯한 고아, 과부, 재난을 당한 사람 등을 돕기 위해 공동금고함에 돈을 넣었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학교도 세웠다. 금고는 특이하다. 거기엔 3개의 열쇠 구멍이 있는데 목회자 대표, 교인 대표, 시민사회 대표가 각각 열쇠를 넣어야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교회 재정에 대한 투명한 관리와 합리적 운용을 보여준다. 또 하나. 교회내 일원이 아닌 시민사회 대표가 공동금고의 열쇠를 갖고 있었다는 건 교회가 사유화된 단체 또는 자신들만의 폐쇄된 집단이 아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방적 공동체였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종교개혁을 통해 당시 교회가 인간의 구원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위한 역할에도 매우 충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행위 또는 행실이 구원의 주요 조건으로 인식됐던 당시 시대 속에서 구원론에 대한 인식이 신의 은혜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과 현실에서의 실천으로 옮겨졌던 셈이다. 실제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 독일 개신교의 자원봉사 시스템을 지탱하는 '디아코니(Diakonie)'의 정신으로 이어지면서 사회 복지의 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본지 9월8일자 A-6면> 또, 종교개혁은 일방적 주입에서 성경을 통해 스스로 고민하며 질문하는 신앙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루터 역시 신앙적 양심에 따른 사색과 깨우침을 저항의 근간으로 삼았다. 특권층만 소유했던 성경이 다시 서민들의 손에 들려지게 했고, 전통과 권위로만 화석화됐던 신앙을 일상으로 스미게 했다. 화려하게 높아지기만 했던 교회 건물과 비본질로 치장됐던 예배 의식이 다시 단순해졌다. 특히 종교개혁의 '만인 사제설'과 '성속 이원론 타파'의 영향력은 신분적 구분이나 위계적 구조에서 벗어나 동등 또는 평등의 사상을 출현시키고 신앙이 가진 의미를 사회, 경제, 정치 등 전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이는 종교개혁이 여러 면에서 중세를 근세로 끌어갔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요즘 교계 곳곳에서는 각종 행사와 세미나 등을 통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아쉬운 건 '종교개혁 500년'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그 의미에 대한 진중한 조명과 깊은 사유보다는 한철 지나가듯 일종의 콘텐츠처럼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500주년'이라는 시간적 의미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종교개혁이 갖는 본질적 가치는 499주년이나 501주년이나 변함없이 똑같이 기억되고 기념돼야 한다. 현재 종교개혁 500주년이 ‘반짝’하고 소비되는 한인 교계와 달리 독일의 분위기는 다르다. 독일교회는 이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루터의 10년(Lutherdekade)’이라는 대주제를 정하고 2008년부터 매해 한가지씩 이슈를 정해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짚어왔다. 매해 다뤄진 주제를 보면 ▶루터의 10년의 시작(2008년) ▶종교개혁과 신앙고백(2009년) ▶종교개혁과 교육(2010년) ▶종교개혁과 자유(2011년) ▶종교개혁과 음악(2012년) ▶종교개혁과 관용(2013년) ▶종교개혁과 정치(2014년) ▶종교개혁과 그림 및 성경(2015년) ▶종교개혁과 하나의 세계(2016년) ▶종교개혁과 500주년(2017년) 등이다. 그만큼 종교개혁이 신앙뿐 아니라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물론 루터나 종교개혁이 남긴 흔적에 대해 무조건 또는 무비판적 수용은 경계해야 한다. 루터가 개인적으로 말년에 보인 반유대주의적 성향, 그가 주창했던 평등 사상을 급진적으로 지지한 세력으로 인해 발생한 농민폭동 및 유혈극의 폐해 등은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또, 종교개혁으로 인해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발생한 ‘30년 전쟁’은 심각한 교파의 분열을 불러왔고, 이는 정치세력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게다가 시대를 뒤집은 줄만 알았던 종교개혁도 얼마 못가 구호만 남았다. 교리와 지성적 울타리에만 갇혀 균형을 잃고 본질을 잃어간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그만큼 개혁은 단지 과거에 머무는 사건이 아닌, 지금도 여전히 진행돼야 할 운동성을 지닌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고 외쳤던 것 아닐까. 그럼에도, 종교개혁 500년의 의미를 되돌아보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교회가 변하면 분명 개인과 사회도 변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교회는 영향력이 있다. 자문해보자. 오늘날 개신교는 그 힘이 있는가. 500주년이 남긴 유산과 몫을 감당하지 않는다거나 성찰이 없는 기념은 헛헛한 외침일 뿐이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17-11-06

(5)"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또 다른 늪으로 교리 싸움과 종파 간 분쟁 극심 실천과 생활 강조하는 경건주의 새로운 신앙 개혁 운동으로 태동 모라비안들이 간직한 신앙과 역사 그러나 경건주의도 곧 쇠퇴의 길로 500년 전 오늘(1517년 10월31일) 마르틴 루터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붙였다. 당시 중세 종교의 시대적 오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종교개혁은 그렇게 불이 붙었다. 시대의 사조는 그때부터 완전히 대전환됐다. 지금 개신교계는 곳곳에서 그 이후 500년인 현재를 기념한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큼 완전한 존재인가. 신앙에 귀속된 인간은 바른 길을 걷기 위해 중세 종교를 개혁했었다. 과연 진정한 개혁은 이루어졌는가. 개혁에 대한 안도는 개인과 사회를 또 다른 늪에 빠지게 했다. 당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100여 년 후 독일에서는 새로운 신앙 운동이 일어났다. 급진적으로 발화됐던 종교개혁이 생명력을 잃어간 탓이다. 이는 오늘날 개신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 헤른후르트=장열 기자 8월25일 헤른후르트 지역. 독일 동부의 아주 작은 마을이다. 체코와 폴란드 국경에 인접한 곳이다. 시골 마을이라 북적대는 도시와 달리 분위기가 너무나 평온하다. 마을 한가운데로 향하니 교회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모라비안 교회'다. 독일의 경건주의가 꽃폈던 시절의 역사를 아직도 간직한 교회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100여 년이 흐른 뒤 서서히 태동했다. 개혁 이후 개신교 종파 사이의 교리 논쟁으로 다툼이 심화된 게 발단이 됐다. 종파 간 분쟁은 분명 종교개혁의 그늘이다. 개신교가 교리 논쟁에 함몰돼 논리, 신조, 체계 등에 신앙의 추가 치우치면서 반대급부로 생겨난 또 다른 개혁 운동이 경건주의였다. 경건주의자들은 교리에만 게토화된 신앙을 일상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교리보다는 삶을 강조하고 신앙의 실천적 의지를 주창했다. 안내를 맡은 김현배 목사(베를린비전교회)는 "이곳은 아직도 모라비안 교도의 후예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라며 "그들은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따르던 사람들로 당시 신앙을 지키려고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했었다"고 말했다. 교회 내부는 상당히 단순하다. 여느 교회들과 달리 일체의 장식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하얀 벽면에 나무 의자, 작은 십자가 하나가 전부다. 교회라고 보기엔 너무나 소박했다. 발걸음을 뗄때 마다 나무 바닥에서 삐걱 거리는 소리만이 실내를 울릴 뿐이다. 설교를 하는 강대상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 문양도 없는 나무 식탁에 초록색 천만 덮어 씌어 있다. 분명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오히려 외형적 치장에 대한 강한 거부가 암묵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만큼 실질적으로 신앙의 실천을 중시했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의지가 곳곳의 여백에서 물씬 묻어나는 듯했다. 나무 의자에 앉아 한동안 설교단을 바라봤다. 순간 거액의 건축 비용을 들여 외형이 비대해지는 오늘날 교회들의 현실이 뇌리를 스쳤다. 진정 누구를 위한 건물이고, 예배 의식일까. 나는 모라비안 교회를 나서 뒤뜰로 나가봤다. 그곳엔 흉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 백작의 흉상이었다. 김현배 목사는 "본래 이 마을은 진젠도르프 백작의 사유지였다. 그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피난온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땅을 주고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며 "훗날 그는 모라비안들과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운동에도 힘썼다"고 설명했다. 마을 내 오솔길을 따라 10여 분 정도를 걸으니 모라비안들이 묻혀 있는 묘지 터가 나왔다. 귓가를 잔잔히 스치는 바람 탓인지 그들의 평안한 안식이 더욱 체감되는 것 같다. 비석은 족히 수백 개는 넘어 보였다. 오랜 세월을 거친 탓에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과 십자가 문양 등은 흐릿해졌지만 그들의 열정과 신앙의 흔적은 선명히 남아있다. 묘지 중간에 작은 언덕을 올라갔다. 거기엔 둥근 모양의 탑이 우뚝 서 있다. 후트버그 기도탑이다.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매일 이곳에 올랐다. 탑에 올라가 보니 마을 전경은 물론 저 멀리 폴란드와 체코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김현배 목사는 “모라비안들은 세계 선교를 위해 이 탑에 올라 무려 100여 년간 매일 기도를 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며 “그들은 매일 저 땅을 바라보면서 조국은 물론 생명력을 잃어가던 독일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진젠도르프 백작이 거하던 집 현관에는 그들이 추구했던 신앙적 가치와 소망이 짙게 배어있는 글귀가 독일어로 새겨져 있다. ‘좋지도 견고하지도 않은 이 집에서 우리는 나그네로서 밤을 보냈다. 우리가 진정 거할 집은 하늘에 있으니 어찌 이곳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유한한 세상에서 영원한 건 없다. 인간도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루터의 종교개혁만 퇴색한 게 아니다. 경건주의 운동 역시 개인의 체험만을 중시하다 본질을 잃고 이후엔 도덕주의, 신비주의 등으로 변질되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이는 개혁의 주체를 논할 때 주어를 ‘인간’이 아닌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김현배 목사는 “교리에만 치우쳐 메말라버린 시대 속에서 생겨난 경건주의가 당시 기독교 역사에 끼친 영향도 크지만 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했다”며 “그만큼 신앙이라는 것은 교리, 경건한 생활, 실천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것 없이 균형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라고 평가했다. 신앙의 도상에서 개혁은 안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적이다. 그 길을 걷는 인간은 결코 자만할 수가 없다. 멈추면 썩게 마련이다. 그게 종교개혁가들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외쳤던 이유다.

2017-10-30

(4)"양심에 어긋난 행동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아"

종교 재판대 섰던 루터의 답변 목숨 내놓고 시대를 향해 외쳐 종교개혁 루터 혼자 이룬 게 아닌 여러 친구와 조력자들 함께 나서 루터 이전에 수많은 개혁가들도 각 시대에 따라 신앙 양심 지켜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대변하는 인물로 꼽혀왔다. 개혁의 시발점을 루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불시에 우연히 발생한 게 아니다. 미완의 연속 선상에서 수많은 이들의 열망과 의지를 통한 발화였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피에르 발도(프랑스), 존 위클리프(영국), 얀 후스(체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이탈리아) 등이 개혁을 갈망하며 그릇에 물을 부었다. 그 물이 비로소 루터 때 넘쳤을 뿐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시대는 루터를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무대로 불러냈다. 루터는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작은 존재였지만 동시대에 함께했던 동역자가 있었기에 그 무대에 함께 설 수 있었다. 독일 아이제나흐=장열 기자 8월30일 아이제나흐 지역 바르트부르크 성. 나를 태운 버스는 20여 분 정도 산으로 올라갔다. 차가 다니는 도로만 빼면 우거진 숲이 전부인 곳이다. 저 멀리 절벽 꼭대기에 오래된 성채 하나가 보였다. 더는 버스가 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직접 10여 분을 걸어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올랐다. 이곳은 루터가 1년간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았던 성이다. 그는 왜 은둔해야 했을까. 95개조 논제로 촉발된 종교개혁(1517년)으로 인해 루터는 1521년 4월 종교 재판인 보름스 제국회의에 서야 했다. 루터는 거기서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황제로부터 파문과 함께 제국 추방령을 받는다. 루터에게 주어진 신변 보장의 기간은 단 3주. 그 후에는 누구든지 루터를 죽여도 무방했다. 이때 루터를 몰래 납치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시킨 인물이 프리드리히 선제후(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 중 한 명)다. 그는 루터의 후원자였다. 아마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종교개혁의 유산은 축소됐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긴박했던 순간에 세간의 이목을 피해야 했던 곳이라 그럴까.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성으로 가는 길은 숨이 가빠올 정도로 험했다. 성내 통로는 성인 두세 명이 지나가기도 비좁다. 루터는 이곳에서 외부와 철저히 단절됐었다. 그는 이 성을 '밧모섬'에 비유했다. 유배됐던 사도 요한의 처지에 자신을 투영했던 셈이다. 그만큼 고통의 생활이었다. 비좁은 통로를 지나 한 작은 방에 들어섰다. 루터가 라틴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던 곳이다. 작은 창문, 책상과 의자가 전부인 이곳에서 루터는 치열하게 성경 번역에 매달렸다. 고독 속에서 엄습하는 어둠을 고작 등불 하나로 막은 채 밤낮없이 번역에 몰두했다. 루터는 성경 번역시 일반 사람들이 쓰는 단어와 문체를 선택했다. 오늘날 표준 독일어의 기반이 루터의 성경 번역에서 다져졌다는 평가도 있다. 루터는 그렇게 10개월 만에 독일어 신약성경(일명 9월 성경)을 번역했다. 루터는 이때 절친한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루터의 동역자이자 신학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이 개정 작업에 동참했었다. 이 성경은 당시 급진적으로 발전했던 인쇄술의 바람을 타고 대량으로 온 독일에 보급됐다. 나는 루터가 앉았던 책상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은둔의 시간을 온통 성경 번역에 쏟았을까. 당시 일반인이 성경을 구입한다는 건 불가했다. 필사본 성경 가격이 500굴덴 정도. 당시 일반 노동자의 한 달 급료가 2굴덴이었다. 그는 성경을 다시 대중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모두가 성경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 발상은 곧 종교의 그릇된 통제와 특권층의 카르텔을 허물고 시대의 사조를 전환한 대변혁의 계기가 됐다. 멜란히톤이 신학적 조력자였다면, 루터의 또 다른 친구 루카스 크라나흐는 예술을 통해 종교개혁의 사상을 전달했다. 바르트부르크성 곳곳엔 루터와 관련된 그림이 많이 전시돼있었다. 그 중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루터의 초상화는 크라나흐의 작품이다. 화가였던 크라나흐는 루터의 평소 모습과 삶을 즐겨 그렸다. 루터의 글에는 대개 크라나흐의 그림이 따라온다. 이 성에서 루터가 번역한 '9월 성경'에도 크라나흐가 그린 21개의 목판화가 삽입돼 있다. 골방에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9월1일 보름스 대성당 앞. 나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 오기 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종교 재판을 받았던 곳을 찾아갔다. 당시 루터가 심문을 받았던 곳은 보름스 대성당 광장 오른편이다. 지금은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에 정죄와 파문 결정이 내려진 살벌한 곳이라고 느껴지기엔 흘러간 시간이 역사를 묻어버린 듯 했다. 대신 ‘루터의 신발’이라 불리는 조형물 하나만이 그가 섰던 자리의 의미를 대변하고 있었다. 1521년 4월16~18일 루터는 이곳에서 사흘간 공개 심문을 받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종교 지도자들이 루터가 쓴 책들을 잔뜩 쌓아둔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시 루터의 나이는 38세. 심문을 맡은 요한 에크 대주교는 딱 두 가지를 물었다. “이 모든 책들을 당신이 썼는가, 그리고 책에 쓰인 주장을 철회하겠는가". 그 물음은 단순히 교리 차이에 대한 힐난이 아니었다. 실제 목숨을 빼앗고자 말속에 칼을 숨긴 심문이었다. 갈림길에 섰던 루터에게는 생과 사의 선택이었으리라. 그때 루터는 하루 동안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두려움이 엄습해서 그랬을까. 아니다. 논리적이고 진실한 답변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루터의 대답은 오늘날 울림을 전한다.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양심에 어긋난 행동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다. 아무것도 취소하지 않겠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중세는 거대한 종교 사회였다. 성경의 오용, 교리의 모순, 비윤리적 행태에 대한 비판과 체제를 향한 대항은 곧 시대에서의 완전한 퇴출과 격리였다. 아니 목숨도 내놓아야 했던 저항이었다. 루터의 답변엔 그만큼 비장함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루터가 섰던 자리를 보면서 오늘날 현실을 돌아봤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개인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는 과연 그 양심이 살아 있는가. 나는 그렇게 자문하며 공원 옆을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로 향했다. 묵직하게 모습을 드러낸 종교개혁 기념비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기념비 중앙엔 마르틴 루터가 서있고, 그 주변으론 후스, 발데스, 사보나롤라, 위클리프, 발데스, 멜란히톤, 로이힐린 등 여러 종교개혁가의 동상이 함께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물었다. 과연 신앙적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 양심은 루터 홀로 지켜낸 것이 아닌, 역사를 따라 각 시대의 인물들이 고수했던 신념이자 가치였다. 루터 역시 그 유산을 부정할 수 없었을 테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 길을 바르게 걷고 있는가.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17-10-23

(3)무거운 짐 짊어졌던 루터, 자유와 해방을 외쳤다

한 곳에서 태어나고 죽은 루터 마지막 설교 못 끝내고 눈 감아 죄와 죽음에 대해 고민하던 중 벼락 사건 겪고 수도원으로 향해 금욕과 절제 통한 신앙적 사투 타락한 현실 목격 후 은혜 깨달아 아이슬레벤은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인생 궤적이 담긴 작은 마을이다. 그는 이곳에서 나고 죽었다. 공교롭게도 인생의 처음과 끝을 한 지점에서 맞이한 셈이다. 루터는 왜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을까. 나는 루터의 족적을 쫓았다. 독일 아이슬레벤=장열 기자 8월28일. 아이슬레벤에 있는 성 안드레아스 교회를 찾아갔다.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했던 장소다. 그때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11장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구절은 어쩌면 루터를 향한 하늘의 음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고단한 길을 걸었던 그에게 하늘이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는 암시였을까. 기력이 다한 루터는 설교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도중에 그 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사흘 후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가 섰던 설교단 앞에서 나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루터가 짊어졌던 무거운 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질문을 안고 루터의 생가와 바로 옆에 있는 성 베드로 바울교회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1483년 11월10일 태어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이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아직도 세례대가 원형으로 보존돼 있었다. 본래 인간은 생과 사의 도상에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다. 중세 때는 더욱 그랬다. 루터는 출생부터 죽음과 밀접했다. 당시 흑사병이 온 유럽을 덮쳤다. 유럽 인구의 절반 정도가 순식간에 사라졌었다. 불가항력의 죽음은 유한한 인간에겐 근원적 공포다. 신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건 사후에 대한 두려움이다. 심판을 피하려면 죄를 사함 받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했다. 중세 때 팽배했던 은혜에 대한 인식이다. 한겨울, 그의 부모는 갓 태어난 루터를 데리고 물 세례를 받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 당시 일반적 풍경이었다. 그만큼 죽음이 일상과 가까웠기에 유아 세례는 하루라도 빨리 천국을 갈구하려는 표현이었던 셈이다. 루터의 생가(현재 박물관)에는 그의 어린 시절의 흔적이 묻어난다. 루터의 부모는 그가 법률가로 성장하길 원했다. 체벌을 가할 정도로 그를 엄격히 훈육했다. 교육열도 대단했다. 어렸을 때부터 라틴어 학교에 보내 각종 지식을 습득하게 했다. 루터는 영특했고 우수했다. 부모의 바람대로 유명한 에르프루트 대학에 법학도로 입학했다. 물론 루터는 체벌과 엄격한 교육 환경속에서 부모를 실망시켜선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한 성향은 훗날 수도사의 길을 걸을 때 초기 루터의 신앙적 습성과도 연결됐다. 죄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다. 나를 태운 버스는 스토테른하임 지역의 한 넓은 들판으로 향했다. 그곳엔 큰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독일어로 새겨진 글귀가 눈에 띈다. "종교개혁의 전환점, 하늘의 번개가 젊은 루터에게 길을 보였다." 루터는 친구와 함께 이 길을 걷다 벼락 사건(1505년 7월2일)을 경험했다. 그때 벼락으로 친구를 잃은 루터는 벌벌 떨며 하늘에 서원했다.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사제가 되겠다고. 그만큼 루터에게 죽음이란 곧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루터는 그 길로 인생을 틀어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갔다. 다음날 나는 에르푸르트 지역의 어거스틴 수도원을 찾아갔다. 벼락 사건 후 보름 후 루터도 이곳에 도착했었다. 그는 삭발을 한 뒤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렸다.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겠다는 다짐이다. 루터는 왜 이곳을 선택했을까. 나는 적막한 느낌의 수도원을 거닐었다. 내부는 간소한 치장이 전부다. 잡념의 여지를 두지 않는 공간이다. 루터가 입문했을 당시 이곳은 에르푸르트에서 가장 규율이 엄격했다. 철저한 수도 생활을 요구했다. 그만큼 루터에겐 인간 본연의 죄성과 맞선 투쟁과 고행이 필요했으리라. 금욕이 죄에 대한 해결과 구원을 쟁취하는 지름길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버둥칠수록 내면의 갈증은 더해갔다. 평안은 일시적일 뿐 그는 여전히 죄성과 싸우는 불의한 존재였다. 육체를 부단히 제어했지만 뭔가 불안했다. 하늘은 그럴수록 더욱 '의'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때 이곳 수도원장이자 스승이었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루터의 고민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슈타우피츠는 크고 작은 죄를 매일같이 고백하던 루터를 보면서 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타락한 존재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려준 인물이다. 그리고 루터가 그 답을 성경에서 스스로 찾게끔 신학 연구를 권유했다. 이 모든 과정은 훗날 루터가 믿음과 은혜에 대한 개념을 깨닫는 신학적 자양분이 된다. 나는 수도원 가까운 곳의 에르푸르트 대성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터가 1년간의 수도원 생활을 마치고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다. 역사는 참으로 짓궂다. 루터가 서품을 받은 제단 바로 밑에는 요하네스 자카리우스의 무덤이 있었다. 자카리우스는 종교재판관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렸던 인물이다. 루터는 그 위에 우뚝 섰다. 짓밟힌 줄 알았던 종교개혁의 씨앗이 다시 싹을 트는 순간이었다. 에르푸르트 지역은 은둔과 고행의 선상에서 루터가 본격적으로 시대적 현실을 목격한 곳이다. 그는 1510년 겨울, 슈타우피츠의 지시로 로마교황청 방문을 위한 순례를 떠났다. 에르푸르트에서 로마까지는 약 800마일(약 1300km). 그 길을 떠나던 루터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교황이 현존하는 도시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컸으리라. 그러나 루터가 당도한 로마는 머릿속에 그리던 신앙적 이상과 괴리가 컸다. 종교의 타락은 심각했다. 성직 매매가 활발했다. 사제들은 성적으로 문란했다. 심지어 돈을 받고 성유물을 보여주며 인간의 구원을 설파했다. 루터는 그 모든 광경을 목도했다. 단순히 윤리적인 타락만 본 게 아니었다. 비윤리는 썩은 문제를 드러내는 표면일 뿐, 루터는 그 뿌리를 봤다. “인간은 본래 죄인이다.” 그는 자신과 모든 인간이 짊어진 죄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 짐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평생 고뇌했을 테다. 루터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예수가 말했던 은혜의 본질을 깨닫지 않았을까. 나는 그의 마지막 설교 본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문했다. 무거운 짐을 진 우리는 결국 어디를 향해 걷는가. 짐(죄)을 내려놓는다는 건 회심에서 비롯된다. 죄에서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오롯이 체득함으로 죄인이라는 존재로부터 해방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 인간과 시대가 흘러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그가 선택했던 마지막 설교 본문은 그가 깨우친 궁극의 답이었으리라.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17-10-16

(2)루터의 손끝이 향한 곳에서 개혁은 시작됐다

작고 아담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 95개조 논제 유럽 전체 뒤흔들어 면죄부 통해 바라본 시대적 현실 번민했던 루터, 결국 펜 들어 반박 독일 곳곳 루터 동상들의 공통점 한 손엔 반드시 성경책 들려있어 중세 독일은 '교황청의 젖소'로 불렸다. 탐욕이 종교의 옷을 입고 횡행했다.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짜낸 돈으로 치장됐고 점점 더 화려해졌다. 진리 대신 탐심으로 배를 불렸다. 종교가 모든 영역을 지배하던 중세. 어둠과 파국의 시대였다. 그때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시대를 반박하는 95개 논제를 내걸었다. 시대의 사조가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독일 비텐베르크=장열 기자 8월28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이곳은 종교개혁의 진원지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곳이다. 마을은 작고 아담했다. 길 하나에 마르틴 루터와 아내(카타리나 폰보라)가 함께 살았던 집, 교회, 대학 등이 동일 선상에 모두 몰려있다. 루터는 이곳에서 무려 35년을 보냈다. 여기서 신학(비텐베르크대학)을 가르쳤고 성경을 설교했다.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루터도 매일 이 길을 걸었으리라. 마을 광장에 이르니 루터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한 손엔 성경이 들려 있었다. 그건 독일 곳곳에 세워진 모든 루터 동상의 공통점이다. 그만큼 루터에겐 성경이 기준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에 손에 들린 성경은 현실과 상충했다. 루터는 고뇌했다. 홀로 수많은 질문도 던졌다. 그때마다 "이게 아닌데…"라며 번민했다. 나는 루터가 살았던 집(현재는 루터 박물관)으로 향했다. 당시 사용됐던 면죄부 함이 눈에 들어왔다. 윗면엔 금화를 넣을 수 있게 깊은 홈이 패어 있다. 그 시대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읽히는 듯했다. 당시 면죄부 판매에 앞장섰던 가톨릭 수도사 테첼은 저 상자를 앞에 두고 만인에게 외쳤을 테다. 금화가 떨어지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죽은 영혼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은 죄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의 시각으로 그때를 어리석게 봐선 안 된다. 무려 1000년 가까이 종교가 인식을 지배했던 중세다. 그릇된 교리가 오랜 세월과 맞물려 모든 사상에 고착된 시절이다. 사람들은 종교의 오도를 눈치챌 수 없었다. 오직 라틴어로 쓰인 성경만 존재했다. 성경과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문맹이 팽배한 시대 속에서 성경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죄와 회심의 문제를 돈과 결부시킨 황당한 교리가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수용됐던 이유다. 인간에겐 죄성이 내재한다. 무의식 속에는 죽음 이후의 두려움이 존재한다. 중세 때도 그랬다. 신의 심판을 피하려면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시 교회는 이 점을 교묘히 이용했다. 본래 구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중세는 인본(人本)적 인식으로 신본(神本)의 세계관을 지탱했다. 아니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당시 사제들은 죄 사함을 위해 행위와 행실을 강조했다. 거기엔 회심과 은혜의 본질이 생략돼 있었다. 선한 행실은 신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반응이다. 그러나 그 자체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루터도 이 지점에서 고뇌했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인가. 구원까지 도달의 기준은 무엇이며 얼마나 노력해야 흠 없는 의로움에 이를 수 있을까. 당시 면죄부 함은 구원에 이르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가장 선명히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사람들은 원죄의 굴레 안에서 두려움을 느낄수록, 내세를 원할수록 면죄부에 영혼을 떠맡겼다. 그릇된 믿음이 축적되자 교회가 높아졌고, 교황의 배는 불러 만 갔다. 루터는 이 모든 광경을 목도했다. 신본으로 가장한 인본의 뿌리를 들춰내야 했다. 현실을 두고 내면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의문은 결국 '95개조 논제'라는 대자보로 폭발됐다. 나는 비텐베르크 성교회로 향했다.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이 교회 정문에 대자보를 붙였다. 처음엔 토론을 통해 문제를 공론화시켜보려던 의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날을 종교개혁의 기점으로 본다. 당시 95개조 논제는 구텐베르크 인쇄술과 맞물려 전 유럽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종교개혁은 그렇게 발화됐다. 루터는 어떤 심정으로 대자보를 붙였을까.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때, 체제에 대한 반발은 어쩌면 사회에서의 제명, 이탈, 배제를 각오한 행동이었으리라. 단지 용기만으로 가능한 객기는 아니었을 테다. 나는 바로 옆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터는 주로 여기서 시편과 로마서를 강의했다. 강의 준비로 묵상을 하던 그에게 성경 한 구절(로마서 1장17절)이 불현듯 가슴을 찔렀다. 그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깨우침이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비롯됨을 비로소 인식했다. 그 유명한 사건이 이곳 '탑 방에서의 경험'이다. 믿음의 의미는 본래 묵직하고 심오하다. 구원의 확신만을 내세워 죄에서의 자유를 빙자한 방종을 합리화 시킬 수도 없다. 은혜가 인간을 성화(聖化)로 걷게 해서다. 오늘날 교회가 소유한 구원의 의미를 돌아봤다. 그 가치가 왜곡되거나 은연중에 값싸게 치부되진 않는가. 95개조 논제는 단순한 현실 비판이 아니다. 비윤리적 행태에 대한 분개도 아니다. 표피에 대한 자극으로 심층의 문제를 휘저은 시대를 향한 포효였다. 루터의 펜 끝은 궁극적으로 신학의 변질을 겨눴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왜곡이 영혼의 눈을 가리고 사회와 시대를 오도해서다. 루터의 신앙은 그의 화가 친구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림을 보려고 루터가 사역했던 비텐베르크 시교회를 찾아갔다. 나는 교회당 제단에 걸린 그림 속에서 한 장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림 속 루터는 동적이었다. 설교대에 서서 한 손을 성경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중앙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향한 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다. 루터는 거기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에서 행동의 확신을 얻었다. 시대 판별의 기준으로 삼았다. 95개조 논제 작성의 바탕이 되었을 테다. 루터가 가리키는 대상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그리고 자문했다. 오늘날 기독교에 그 십자가는 과연 울림이 있는가.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17-10-09

(1) 불에 탄 거위 "100년 후 태울 수 없는 백조 나타날 것"

종교개혁 불씨 됐던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전 종교개혁가 표피 너머 시대 현실 직시해 성경 진리에 대한 믿음 고수 프라하 명물 천문시계탑 의미 유한한 인생 향해 종소리 울려 1517년 10월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당시 종교적 상황을 비판하는 '95개조 논제’를 붙였다. 그건 시대를 향해 목숨을 내건 고함이었다. 지난 8월22~9월1일까지 독일, 체코, 프랑스 등을 돌며 종교개혁자들의 발자취를 쫓았다. 진리의 왜곡은 무섭게 변질을 낳았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니 무지가 인간의 영혼을 잠식했다. 종교의 심각한 오도였다. 어둠은 그렇게 중세를 드리웠다. 시대는 빛을 필요로 했다. 아니 갈망했다. 어둠을 밝힐 횃불이 암묵적으로 요구됐다. 종교개혁은 대변혁이다. 교회가 본 모습을 찾으면 개인과 사회, 시대의 사조까지 뒤바꾸는 힘이 있다. 본지는 종교개혁 현장 방문기를 종교면에 시리즈로 연재한다. 체코 프라하=장열 기자 8월26일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얀 후스(Jan Hus·1372~1415·작은 사진) 동상이 광장 중심부에 우뚝 서있는 곳이다. 흔히 종교개혁 하면 독일의 '마르틴 루터'를 떠올리기 마련. 그러나 그보다 100여 년 앞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마련한 인물이 당시 프라하 대학 신학부 교수이자 사제였던 얀 후스다. 안내를 맡은 김현배 목사(베를린비전교회)는 얀 후스 동상을 가리키며 "당시 성경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고 화형 당한 인물"이라며 "동상 밑에 새겨진 글씨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하라'는 후스의 명언"이라고 소개했다. 죽기까지 후스가 외쳤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후스 동상의 시선은 오른쪽 두 개의 첨탑이 솟아있는 틴교회당을 향하고 있다. 그곳은 생전에 후스가 성경의 진리를 설교했던 장소다. 프라하는 온 도시가 유네스코에 등록돼 있을 정도로 아름다움이 밀집된 곳이다. 동상 주변으로 비투스 대성당의 자태와 카를 다리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성의 야경은 황홀할 정도다. 분명 후스도 프라하의 전경을 두 눈에 담았으리라. 그러나 당시 그는 시대의 이면을 냉철하게 직시했다. 표피 너머 부패한 가톨릭 교회로 시선이 향해 있었다. 광장 왼편에는 프라하의 명물 천문시계(1410년 제작) 탑이 있다. 그 앞으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었다. 정각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 시계 밖으로 돌아가는 12개의 인형을 보기 위한 인파다. 몇분 후 종이 울리자 곳곳에서 관광객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종소리에는 본래 인생을 향한 경고가 담겨있다. 12개의 인형 중 해골 모양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모래시계는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울리는 셈이다. 하지만, 경종의 소리가 아무리 귓가를 때려도 욕망은 내면에서 넘실댄다. 인간에겐 죄성이 꿈틀대서다. 당시 종교는 그 굴레에서 타락으로 점철됐다. 후스도 그러한 현실과 늘 마주했다. 그가 프라하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던 해(1393년)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를 팔고 있었다. 사람들은 죄의 문제를 참회와 신의 은총이 아닌 돈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면죄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천국을 돈으로 구걸했다.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물질(돈)을 쌓아나갔다. 인간의 욕망은 신의 뜻으로 포장됐다. 후스가 활동할 당시 가톨릭 교회는 무려 교황이 셋이나 있었다.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부패로 어그러졌다. 신학자로 그리고 설교가로 활동했던 후스는 암흑 적 상황의 원인을 성경의 부재에서 찾았다. 당시 서민들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문맹이 팽배했다. 당시 가톨릭 미사는 라틴어로만 진행됐다. 성경도 라틴어로만 쓰여졌다. 서민들은 읽지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 앞에서 그저 자신의 영혼을 내맡겼다. 후스는 그 시대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 라틴어 대신 모국어(체코)로 설교했다. 성경도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했다. 언어를 통한 이해는 영적 무지를 깨우기 시작했다. 성경을 굳게 잠갔던 자물쇠가 풀리자 진리의 심층적 의미가 대중의 눈꺼풀을 벗겨냈다. 후스는 교회의 권위가 교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설파했다. 그건 가톨릭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소리였다. 당시 초월적 권력과 부를 누렸던 이들에게 후스는 분명 눈에 가시였으리라. 결국, 그는 콘스탄츠 종교재판에 소환돼 사형선고(1415년)를 받았다. 그것도 흔적마저 없어지는 '화형' 이었다. 그는 사형 선고 직전 제안을 받았다. 교황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고 입장을 번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제의다. 그러나 후스는 마다했다. 진리에 비추어 양심을 거스를 바엔 차라리 한 줌의 재가 되겠다는 작심이었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이다. 나무 기둥에 묶여 불에 타기 직전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오늘 당신들은 볼품없는 한 마리의 거위를 불에 태우지만 100년이 흐른 뒤에 영원히 태울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신의 목소리를 대변한 예언이었을까. 그로부터 100년 뒤 실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무대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후스가 말했던 백조를 루터에게 투영했다. 후스의 동상 앞에서 나는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 종교 개혁은 하루아침에 시대를 뒤엎는 '혁명(revolution)'과는 달랐다. 본질(성경)로 회귀하려는 '개혁(reformed)'이었다. 그러나 회귀까지 무려 1000여 년을 보내야 했다. 그만큼 종교 개혁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수많은 의지로부터 촉발됐다. 진리를 향해 암흑의 시대를 역행했던 걸음들이 축적된 결과다. 후스가 불에 탈 때 종교 개혁의 여명은 밝아오고 있었다. 그 빛을 후스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을까. 진리는 그렇게 사수돼왔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1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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